인도네시아여행

인도네시아여행: 스마랑 삼포공(SAM POO KONG)

새잔차 2014. 6. 10. 22:19

 스마랑은 인구 300만 이상이 살고 있는 도시이지만 주변에 시민들이 나들이 갈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이런 생각은 나의 관점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누군가 여기를 방문해 오면 안내해서 갈 적당한 장소가 거의 없다.    

 

그런데....

어느날 이곳 유치원 아이들과 조금 먼거리에 위치한 작은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 오는 길에 아이들이랑 학부모가 들린 곳이 있다.

'SAM POO KONG' 이라는 곳이다.

 

 

입구는  빨간 색의 중국풍의 건물이다.

스마랑의 다른 건물들과는 완전 분위기가 다른 모습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세운 장소인가... 

하고 들어 갔는데...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 여성이 착용하는 질밥을 머리에 두른 여성들이 여기 저기 많이 보인다.

어떤 성격의 장소인지...  혼란스럽다.


 

 이곳은 몇채의 건물이 있지만 모두 건립한지 얼마되지 않은 듯 하다.

 

 


중국 산신당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듯한 

요상한 모습의 인물상이 보인다.

도교 사원인가?

 

 


어느 건물에는 중국식 현판도 있다.

"三保大人"

무슨 뜻일까

 

별다른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이리 저리 살펴 보는데

저 멀리 크다란 비석같은 게 보인다.

아마 저기에 설명이 있을 것 같다.




 

 

Klenteng Sam Poo Kong


이 장소는 어떤 한 인물, 즉 삼보(三保)라는 인물을 기리는 사원이다.  

내부에 커다란 돌비석에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이 있다.

'Zheng He(1371~1435)'라는 인물...

어떤 사람인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 인물을 찾으니 정화(鄭和)라는 이름이 나온다.

어, 이 사람 중국사람인데...  한번 들어본 이름이다.

 

정화(鄭和, Zheng He 1371~1435)

이 인물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대단한 인물이다.

명나라 영락제 때 명을 받아  “남해원정”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동쪽해안 케냐까지

30여 나라를 바닷길로 항해한 인물이다. 

15세기 후반 서양에서  '대항해 시대'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누볐던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드라마에서도 얼핏 본 듯하다.

 

본명은 마화(馬和),  마삼보(馬三保) 또는 환관이어서 삼보태감(三保太監)으로도 불린다.

이곳의 이름이 'Sam Poo Kong' 인것은 바로 정화를 위한 사원이란 뜻이다.



마(馬)씨라는 성은 무슬림에게 흔한 이름인 '무하마드'를 중국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중국 윈난성(雲南省) 관리였던 부친 마합지(馬哈只)는 서역 출신 무슬림으로 

합지(哈只)라는 이름이  메카 순례를 마친 무슬림들에게 붙는 칭호 하지(Hajj)의 한자어라고 하니

'정화'는 중국인이지만 무슬림이다.

그래서 이곳의 건물은 중국식이고 여기를 오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많은 거다.


윈난성에서 살던 '정화'는 어린나이에 명나라의 포로가 되어 환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명나라에서 연왕(燕王)을 섬기다가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

나중에 영락제가 된 연왕(燕王)에게 결정적 도움을 줘 그 공으로 태감이 되고 또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화(馬和)에서 정화(鄭和)로 이름이 변경된 것이다.

 

'정화'의 업적은 영락제의 명을 받아 시작된 남해원정에 있다. 

1405년부터 1433년 까지 바다를 통한 이동이 여의치 않던 시기에 7차례나  '정화'의 거대한 함대가 

인도양을 넘어 중동, 아프리카까지 누볐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바다에 항로를 개척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서 인도양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까지 간 것이다.



'정화'는 7차 원정에서 돌아 온 이듬해에 사망했는데

중국에 있는 그의 무덤은 빈무덤이고 그는 바다에 수장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역사가는 그가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에 사망하여 스마랑에 묻혔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 이 건물은 그런 뜻에서 건립된 것이 아닐런지...

 

자료를 찾다 보니 '정화'가 이끈 중국 선단은 어마어마한 함대였던 것 같다. 

매 원정마다 2만 7000여명의 인력과 대형 함선인 보선(寶船) 60여척 그리고 100척 정도의 소형 함선이 있었고  

의사도 150명에 한 명꼴로 배치되어 그 수가 180명이나 되었다고....  

하루에 소비되는 식량만해도 70톤 가량이라니 과장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규모다.


콜럼버스가 1492년 함선3척에 승무원 120명으로 항해했고,

바스코 다가마는 1497년 함선 4척에 승무원 170명으로,

마젤란은 1505년 함선 5척과 승무원 265명으로 항해 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그런데 중국이 서양보다 더 이른 시기에 대규모 함대를 가지고 멀리 아프리카까지 바다로 진출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더 이상 해상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보면  이때부터 해상에 관심을 가졌던 스페인이나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은 국가적으로 커다란 부를 가지게 돠는데....

비록 세계사적으로는 식민지 약탈이라는 침략을 한 것이지만...

국가적으로는 항해를 시작한 이때부터 부를 축척한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은 이때부터 뒤쳐저서 서양인들에게 침략당했다고 할수 있지 않을까 

 

암튼

이곳 스마랑에 '정화'를 기리는 장소를 만든 것을 보면 이 인물과 많은 관련이 있는 곳인가 보다.

볼만한 곳,

갈만한 곳이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이런 장소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위치 : Jalan Simongan Raya No. 129, Bongsari, Semarang


sam poo kong.jpg
0.79MB